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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창립과
국내 소재산업의 개척

회사의 창립

  • 1992.09 삼성전자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1992.09 삼성전자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 1994.08 삼성전자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1994.08 삼성전자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 도쿄 스미토모화학 본사 전경

    도쿄 스미토모화학 본사 전경

세계 반도체산업은 1959년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Co.)의 IC 개발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 통신, 군수장비 등 다양한 산업에서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미국, 일본 등지에서 반도체 전문기업들이 잇달아 설립됐다.

당시 선진 반도체회사들은 고부가가치의 웨이퍼 가공생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임금이 저렴한 개발도상국에 조립공장을 건설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에도 합작 반도체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65년 고미반도체, 1966년 시그네틱스, 1967년 페어차일드, 모토롤라 등 미국계 회사들과 1969년 일본 도시바가 지분 70%를 투자한 한국전자가 설립됐다.

삼성전자가 1974년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면서 한국 반도체산업은 일대 도약의 길로 들어섰다. 삼성전자는 1983년 64K D램 개발에 이어 1984년 10월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1년 반 만인 1986년 7월 삼성전자는 당시로서는 ‘꿈의 반도체’로 여겨지던 1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금성반도체도 1985년 6월, 11월 각각 64K S램, 1M 롬 개발에 성공했으며, 현대전자는 1986년 5월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며 불과 10년 만에 선진국을 추월했다. 1994년 8월에는 256M D램을 역시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삼성전자의 D램 분야 시장점유율은 1987년 세계 7위였으나 1990년 2위로 뛰어오른 데 이어 1992년에는 드디어 1위 자리에 올랐다. 1993년에는 전체 메모리 반도체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금성반도체는 1995년 D램 분야 세계 5위, 종합 반도체시장 세계 13위를 차지했다. 현대전자도 1991년 16M D램, 1992년 64M D램을 개발하며 세계 반도체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의 메모리 분야에서 선도적인 존재로 부상했으나 국내 반도체 재료산업의 기반은 척박하기만 했다. 반도재료산업은 반도체 소자산업에 비해 시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양한 가공 기술과 기초 기술이 집약돼 있는 산업이다. 때문에 메모리 업체들이 대량생산 체계에 들어선 이후에도 전체 반도체 재료의 80%는 여전히 해외로부터 수입해 사용했다. 정부 또한 소자산업에 비해 재료산업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재료산업은 반도체 소자산업의 기술 변화나 발전 속도에 맞춰 양상이 급변하고 기술 수명도 짧기 때문에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거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와 노력이 소요된다. 그만큼 사업 리스크가 높고 자금 부담 등의 어려움도 많다.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재료사업에 뛰어들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대기업들은 시장 규모에 비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재료산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반도체 재료산업의 발전은 더디기만 했다.

그중 고순도 화학약품인 반도체약품은 세정용, 에칭용, PR 공정용으로 크게 나뉘는데, 특히 세정 분야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입자나 금속불순물을 극한까지 제거하기 위해서는 고순도화가 필수적이다. 256M D램급에서 요구되는 고순도약품 규격은 금속불순물 함유량이 10ppt 이하, 음이온(Anion)이 10ppb 이하여야 하며, 0.2미크론 입자보다 큰 입자가 1리터당 20개 이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량금속과 미립자의 제거 및 분석 기술의 확립이 매우 중요하지만, 국내 기술은 미흡한 수준이었다.

반도체 고순도약품의 국내시장 규모는 1992년 기준 2만 4,000톤을 기록해 약 340억 원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국내 자급도는 매우 낮았다. 황산은 1992년 기준 국내 황산 수요량의 15.9%만을 국내에서 공급하고 나머지 84.1%는 수입했다. 고순도 과산화수소는 1992년까지 국내 공급이 거의 없었다.

반도체용 고순도약품의 세계 시장 규모는 1991년 4억 4,000만 달러에서 1992년 4억 7,000만 달러로 확대되는 등 연평균 8.5%의 신장률을 보였다. 반도체산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세는 더욱 급속할 전망이었다. 더욱이 세계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이 한국으로 전환되고 있어 한국의 반도체용 고순도약품 시장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됐다.

TIP BOX

108년 전통의 세계적인 종합화학기업, 스미토모화학

스미토모화학의 역사는 1913년 시작됐다. 일본 스미토모 가문은 에히메현의 벳시 동광산 채굴과정에서 발생된 아황산가스로 인해 환경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제련 시 발생하는 유해 아황산가스를 황산으로 변환한 과인산석회 제조기술을 익혔는데, 과인산석회는 화학비료의 원료로 쓰였다. 이에 1913년 9월 스미토모 총 본점의 직영사업으로서 에히메현 니이하마에 비료제조소를 설치했다. 1925년 6월 스미토모 총 본점은 비료부문을 독립시켜 에히메 공장에 스미토모 비료제조소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설립했다.

스미토모 비료제조소는 황산의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 과인산석회 생산 외에 황산 암모늄사업에도 진출했다. 1931년 암모니아 제조를 개시했다. 이어 질산, 메탄올, 포르말린 등의 공업약품 사업을 확대해 비료회사에서 화학회사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934년 2월에는 상호를 스미토모화학공업으로 변경했다.

1944년 일본염료제조를 합병하면서 염료, 의약, 농약 등 정밀화학제품 분야에 진출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정용 살충제와 농약사업을 포함한 농업화학 분야에 진출했다. 첫 제품은 유기인계 파라티온이었다. 파라티온은 자체 개발한 농약 스미치온(페니트로티온)으로 대체됐고, 대히트를 했다. 가정용 살충제와 안전성이 높은 농약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농업화학 분야는 정밀화학사업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 스미토모화학은 에히메현에 일본 최초로 에틸렌공장을 완공해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했다. 이후 치바현에 대규모 에틸렌공장을 건설하고 다양한 유도품을 도입하는 등 석유화학사업의 확대를 꾀했다. 알루미늄사업은 1932년 알루미늄의 주 원료인 알루미나 제조 시험을 시작하면서 태동했다. 이후 파인 알루미나, 고순도 알루미나, 고순도 알루미늄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기초화학부문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종합화학회사로 탄탄히 성장해 온 스미토모화학은 2001년 정보전자화학부문을 신설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LCD용 광학기능성 필름, 컬러필터, LCD 백라이트용 확산판, 도광판 재료, 고분자 유기 EL 재료 등 차세대 IT에 필요한 재료부문을 추구해 더 큰 성장을 이뤘다. 특히 주력해야 할 시장으로서 한국, 중국, 대만을 중시해 동우화인켐 평택공장 등 현지에 생산공장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액정 패널의 급속한 보급에 대응해 편광필름과 컬러필터 등 액정 표시 부재의 성장이 거듭됐다.

비료 제조를 시작한 1915년 말 스미토모화학의 사원은 불과 160명이었다. 100여년 후 현재 스미토모화학은 전체 구성원 3만여 명의 글로벌 종합화학기업으로서 세계 110여 개국에 다양한 화학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100년을 이어 가는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창조적 하이브리드 케미스트리’라는 방침 아래 차세대 사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회사의 창립

  • 1979.03 전북 익산 과산화수소 공장 건설 모습

    1979.03 전북 익산 과산화수소 공장 건설 모습

  •  1991.08.23 반도체 약품 합작회사 설립 기사(매일경제)

    1991.08.23 반도체 약품 합작회사 설립 기사(매일경제)

  • 1992년 익산공장 전경.jpg

    1992년 익산공장 전경

스미토모화학은 1970년대 초반 미국 얼라이드 케미컬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과산화수소수, 황산, 암모니아수등 반도체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반도체회사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에 공급해 반도체 재료사업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PR(Photo Resist), 세정제 등으로 반도체 재료의 품목을 확대했다. 특히 PR 분야에서 i-line 기술을 개발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했다. 미세화를 위해 선폭이 좁은 회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광광의 파장이 짧아야 하고, PR은 짧아진 파장의 빛에 대한 감광성이 높아야 한다. 노광광의 파장은 고압 수은등에서 방출되는 436nm(g-line)에서 365nm(i-line)로 진화하고 있었다. 스미토모화학은 선도적으로 i-line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3사가 주목할 만한 개발성과를 거두자 스미토모화학은 한국 시장을 주목했다. 당시 스미토모화학은 16K D램이나 64K D램용 제품은 한국의 대리점을 통해서 공급하고, 1M급 이상의 D램용 제품은 스미토모화학에서 직접 공급했다. 이후 한국 반도체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스미토모화학의 한국 공급량도 급증했다. 반도체약품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많을 때는 수만 갤런까지 보내야 했다. 점점 더 공급량이 증대하자 탱크로리로 공급하는 방안 등도 논의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스미토모화학은 제품 수출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현지에 제품을 생산할 회사의 설립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조인트 벤처 형태로 한국에 진출하기로 하고 뜻을 같이 할 회사를 적극적으로 물색했다. 당시 한국의 관련 업체들도 반도체약품에 주목하며 스미토모화학에 제휴를 타진하고 있었다. 그중 제일합섬을 협상대상자로 정했다. 제일합섬이 삼성그룹 계열사라는 점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제일합섬 입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스미토 모화학의 제품들을 다량 사용하고 있어 수급의 일관성 측면에서 스미토모화학과의 제휴가 크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당시 제일합섬은 화학약품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스미토모화학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도입해 자사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스미토모화학과 제일합섬 간 합작회사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1년 반이 넘도록 제일합섬의 최종 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반도체 재료 재활용 움직임이 있었고, 미국에 있는 황산 리사이클 기술을 활용 하자는 의견도 제기돼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라니아(Piranha) 공법이라고 불린 황산 리사이클 공법은 기술 개발이 이뤄지면 반도체공장의 황산 사용량을 50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스미토모화학은 미국의 기술은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1990년대 초반 스미토모화학은 동양화학(현 OCI) 으로부터 반도체약품에 관한 사업을 제안받았다. 당시 동양화학은 반도체약품사업의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전자재료사업부를 신설해 EMC(Epoxy Molding Compound: 에폭시 봉지제)와 함께 반도체용 시약 생산에 나섰으나 품질이 낮은 데다 공급량도 적어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1989년부터는 반도체용 과산화수소 및 황산 개발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제조 및 분석기술이 부족해 고순도를 실현하지 못했다. 이 분야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회사가 바로 스미토모화학이었다.

사실 스미토모화학과 동양화학은 일찍부터 교류를 해오고 있었다. 스미토모화학은 1960년대부터 한국 시장에 염료와 고무약품을 판매했는데, 동양화학이 고무 약품의 원료를 스미토모화학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섬유산업과 고무산업이 활황을 맞이한 시기였으므로 스미토모화학에도 한국은 매우 중요한 시장 중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스미토모화학은 동양화학에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거래 관계 속에서 형성해 온 신용을 바탕으로 스미토모화학은 동양화학과의 합작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동양화학이 같은 화학 전문기업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동양화학의 미래 전망도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1991년 4월 스미토모화학과 동양화학은 사업성 검토와 회사 설립방안에 대한 실질적인 협의를 시작했다. 양측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한국과 일본을 서로 오가며 의견을 조율했다. 약 6개월간의 협의를 거쳐 같은 해 10월 합작의 기본적인 골격을 마련했다. 첫째 반도체약품을 생산할 회사를 한국 내에 별도 법인으로 설립한다, 둘째 동양화학은 익산공장의 부동산과 시설을 중심으로 한 현물출자와 현금출자를 병행하고 스미토모화학은 현금출자를 한다, 셋째 양사의 지분은 50:50으로 한다. 스미토모화학은 이토추상사와 지분을 나눌 수 있다, 넷째 동양화학은 현재 가지고 있는 설비와 인력을 제공하고 스미토모화학은 기술을 제공한다, 다섯째 신설법인의 실무적인 운영은 동양화학이 담당한다, 여섯째 신설법인 설립 후 반도체용 과산화수소와 황산 공장을 빠른 시일 내에 준공하여 제조 판매한다 등이었다. 그 과정에서 스미토모화학은 3가지 문제를 고심했다. 첫째는 동양화학이 현물출자하기로 한 부동산과 설비의 금액을 평가하는 문제였고, 둘째는 동양화학 익산 공장의 환경문제였다.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스미토모화학은 동양화학 익산공장 부지 지하에 폐기물이 묻혀 있는지, 유해한 매설물이 없는지, 기름이 유출돼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노사문제에 대한 우려였다. 두 회사가 합작을 논의할 무렵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한국에서는 노사문제가 분출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일본 기업들은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를 근간으로 협조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스미토모화학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운동에 많은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신설하려는 회사는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반도체 관련 산업이기 때문에 심각한 노사문제가 발생할 경우 회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판단했다.

동양화학 역시 합작에 대해 많은 검토를 거듭했다. 우선 출자하기로 한 부동산 및 설비의 현물출자의 금액을 합리적으로 평가해야 했다. 동양화학 익산공장은 1979년 5월 과산화수소사업을 위해 인수한 공장이었다. 당시 전주, 익산지역에는 면방직 회사와 제지업체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동양화학은 이 기업들에 표백제로 쓰이는 과산화수소를 공급했다. 이후 일반시약, EMC, 인쇄회로 기판용 화학약품, 알루미나 기판 등으로 생산품목을 확대했다. 동양화학이 스미토모화학과의 합작을 위해 현물출자로 내놓은 공장부지는 총 4만 9,600여m2 중 약 9,900m2 였다.

우선 동양화학 익산공장은 반도체약품 생산공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도체약품인 고순도 과산화수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료인 저순도 과산화수소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이미 과산화수소를 생산하고 있어 원료 공급이 원활했다. 특히 주 공급처인 S사 기흥사업장이 2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S사 기흥사업장은 1990년까지 4개의 D램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었다. 1993년 5월 준공된 기흥사업장 5라인은 세계 최대 규모로, 16M D램을 월 300만 개까지 생산할 수 있었다. 급증하는 반도체 수요에 대응해 부피가 큰 반도체약품을 대량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객사와의 거리가 중요했는데, 익산공장은 그 요건에 부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양의 금성일렉트론 연구소나 이천의 현대전자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나, 공급물량이 많지 않을것으로 예상돼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용수문제도 익산산업단지에 충분한 물이 공급되고 있어 곤란을 겪지 않을 것으로 판단됐다.

결국 스미토모화학과 동양화학은 공장 부지와 설비에 관한 감정평가에 의거해 동양화학 익산공장의 일부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회사의 창립

  • 설립 당시 동우화인켐 로고

    설립 당시 동우화인켐 로고

  • 1991.08 동우반도체약품주식회사의 운영에 관한 각서(일문)

    1991.08 동우반도체약품주식회사의 운영에 관한 각서(일문)

신설 법인 상호는 스미토모화학의 제안에 따라 ‘동우(東友)반도체약품’으로 결정했다. 동양화학의 ‘동(東)’ 자와 스미토모(住友)화학의 ‘우(友)’ 자를 조합한 것으로 ‘동쪽의 친구’라는 뜻을 담았다. 제품과 기업 이미지를 상징하는 심벌마크는 일본 스미토모화학이 쓰고 있는 ‘정(井)’ 자형 마크를 응용하고, 마름모 안에 동우의 이니셜인 ‘DW’를 넣기로 했다.

경영 측면에서는 양사가 공동으로 경영하되 임원은 동수(同數)로 두기로 했다. 2인 공동대표 체계하에 대표이사 사장은 동양화학 측에서 대표이사 부사장은 스미토모화학 측에서 맡기로 했다. 인사 및 급여제도는 한국 실정에 맞게 동양화학의 체계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사무직, 엔지니어, 생산직 등의 인력은 동양화학 측에서 수급하되 스미토모화학에서 주요 기술진을 파견해 기술력 향상을 지원하기로 했다. 신설 법인의 본점은 전북 익산시 신흥동 740-30번지로 하고, 서울 중구 소공동 50번지 동양화학빌딩에 서울사무소를 두기로 했다. 스미토모화학과 동양화학은 1991년 10월 합작회사 설립에 관한 의향서(Letter of Intent)를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신설 법인인 동우반도체약품 인허가를 추진했다. 보통 상법상의 법인을 신설하려면 자본금 5,000만 원 이상을 출자해 주주를 구성하고 이를 관할 세무서에 신고하면 마무리된다. 그러나 동우반도체약품의 설립은 의외로 어려웠다. 외자 도입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 입장이 부정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과산화 수소, 황산 생산시설이 충분해 물량이 남아도는 형편이므로 굳이 외자까지 도입해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동양화학을 중심으로 하여 일반약품이 아닌 반도체용 고순도 약품이라고 설득했으나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재무부의 협조를 얻어 외자 도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첨단기술’ 허가 문제도 난항에 부딪혔다. 첨단기술이란 정부가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첨단 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술 및 제품을 지정한 것으로, 당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첨단기술위원회에서 선정했다. 첨단기술 제품으로 지정되면 산업기술개발자금, 산업기반자금 등 각종 정부자금 지원 우대와 세금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 반도체약품 전문가가 없어 평가조차 쉽지 않았다. 국립화학연구소에 기술평가를 의뢰해 어렵게 첨단기술 평가를 실시했다. 국립화학연구소는 각종 자료를 정밀 평가한 결과 적합 판정을 내렸다. 이로써 신설 법인은 첨단기술 허가를 받게 됐다. 마침내 1991년 12월 7일 재무부로부터 외자 도입을 통한 외국인 합작회사 설립 허가를 받았다. 동우반도체약품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사업목적은 전자공업용 고순도 약품의 수입·제조 및 판매, 일반화학공업약품의 제조 및 판매, 일반무역업 및 수출입대행업, 이와 관련된 부대 사업 일체 등으로 정했다. 대표이사 사장에는 동양화학 한의섭 상무이사가, 대표이사 부사장에는 스미토모의 야마무라 씨가 선임됐다.

외국인 합작회사 설립 허가 당시 설립자본금은 5,000만 원이었다. 이후 스미토모화학과 동양화학은 설립자본금을 90억 원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출자 지분율은 동양화학 50%. 스미토모화학 40%. 이토추상사 10% 로 정했다. 3사는 지분율에 따라 주금(株金)을 납부한데 이어 설립 다음 날에는 자본금을 2억 원으로 늘렸다.

이어 같은 해 12월 27일 8억 원, 12월 29일 32억 원으로 증자했다. 증자는 계속돼 이듬해인 1992년 1월 7일 72억 원, 1992년 5월 20일 90억 원으로 증자돼 상호 약정한 자본금 납입이 완료됐다. 동우반도체약품의 조직은 크게 서울사무소와 익산 공장으로 구성됐다. 서울사무소에는 업무부와 영업부를 두고 총무, 인사, 관리, 영업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익산공장에는 관리, 품질관리, 생산 등 3개 팀을 조직했다. 스미토모화학의 기술자문역은 공장장을 보좌해 각각의 업무를 기술 지원했다.

고순도 반도체약품은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첨단설비뿐만 아니라 공장을 운영할 인력의 높은 기술수준이 동시에 요구됐다. 동우반도체약품은 설립과 동시에 기술진을 일본 스미토모화학에 보내 기술연수를 받도록 했다.

 1992.09 일본 치바 연수 중 토론하고 있는 동우화인켐 연수생들

1992.09 일본 치바 연수 중 토론하고 있는 동우화인켐 연수생들

1992년 초 5명의 인력이 처음으로 일본 연수를 받았다. 스미토모화학에서 약 한 달 동안 고순도 반도체약품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교육받았다. 이어 같은 해 8월 약 3주일간 대규모 연수를 실시했다. 설비 운전, 각종 지표를 유지하고 조정하는 방법, 운전작업 전후처리, 수지(Resin)처리, 생산 후 포장작업, 고순도를 유지하기 위한 오염원의 차단·관리 등 생산에서부터 품질관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망라했다.

특히 고순도제품을 만들기 위한 철저한 공정관리 및 과학기술에 대한 개념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동우반도체약품 연수진은 아직 일본어가 능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장차 회사의 기술 토대를 마련한다는 사명감으로 선진기술 습득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기술진의 일본 연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분야별 필요에 따라 여러 명이 팀을 이뤄 짧게는 몇 주일, 길게는 몇 달씩 실시했다. 이에 힘입어 동우반도체약품 생산 인력의 기술력은 조금씩 향상됐다.

물론 교육과 실제 생산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단기간의 기술연수로 생산기술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격차 극복을 위해 스미토모화학이 기술진을 기술자문역 자격으로 동우반도체약품에 파견해 기술지도를 실시했다.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과산화수소공장과 분석센터의 건설공정에도 최상의 설비가 이뤄지도록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동우반도체약품은 기술진의 일본 연수와 함께 기술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반도체약품에 대한 고도의 기술력을 축적하기 위해 연구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양화학도 익산공장에 중앙연구소 익산분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우반도체약품은 법인이 달랐기 때문에 설립 초기 기존의 기숙사 건물에 실험장비를 갖추고 분석업무를 수행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연구역량이 향상되지 않아 별도의 연구소 설립을 우선 추진한 것이었다.

1992년 10월 15일 익산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인원은 총 12명이었다. 이때만 해도 연구나 제품개발보다는 분석기능 습득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메탈 분석장비, 음이온 분석장비, 파티클 분석장비 등을 갖췄다. 미량 무기원소 분석을 위한 ICP-MS, ICP-AES를 비롯해 음이온에서는 IC, 파티클에서는 Particle Counter 등의 장비를 도입했다. 과산화수소수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장비도 설치했다.

익산기술연구소는 스미토모화학으로부터 과제를 받아와 이를 수행하고 생산팀의 제품 분석에 힘을 기울였다. 1993년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주 공급처인 S사 담당자들과 지속적으로 기술협의를 실시했다. 파티클 분석 시에는 샘플링이 아주 중요했다. 특히 공기중에 먼지 같은 입자가 많고, 용기 내에 주입될 경우 순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샘플 용기를 클리닝하는 과정이 관건이었다. 이에 파티클이 완전히 제거된 초순수를 이용해 50번 이상 세정함으로써 파티클 오염을 최소화했다. 함량 분석은 습식 분석을 택했다. 기기를 통한 분석은 2% 이하인데, 사람이 분석할 경우 0.1%로 떨어뜨릴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습득해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